[오마이뉴스 김혜원 기자]"우린 미국 동부 쪽 사립학교인데 1년에 줄잡아 1억 정도는 들어가는 것 같아. 등록금이 보통 한학기당 3천만원 이상이고, 하숙비에 학원비, 과외비, 용돈까지. 달러가 올라가니 숨이 막힐 지경이지. 그런데다가 미국도 좋은 대학으로 진학하려면 따로 특기 과외를 받는 건 필수잖아."

"우리 둘째는 처음에 싱가포르로 보냈었거든. 교육환경이 좋다고 하더라구. 그러다보니 그쪽 애들 학력 수준이 워낙 높아서 한두 학년 내려서 진학을 해야 하고, 진학을 한 뒤에도 계속 과외 선생을 붙여 주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어렵더라구. 그러지 않으면 인터내셔널 스쿨을 보내야하는데, 거기도 서열이 있어서 호주, 미국, 영국 애들이 다는 학교는 1, 2년 기다려야 자리가 난다더라구. 한 1년 기다려도 자리가 나지 않아 결국 영국으로 옮겼잖아." "우리 앤 호주로 보냈었는데 적응을 못해 반년도 못하고 돌아왔어. 준비하고 적응하는 기간까지 1년 넘게 공백이 있다보니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학교에 적응하는 데도 얼마나 힘 드는지 몰라. 솔직히 다시 보낼까 고민 중이야. 이번엔 내가 따라가려구." 최근 강남·서초구 초등학생의 4% 정도가 조기 유학을 떠났다는 보도를 보았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평균 25명 중 1명 꼴이라지만 대치동처럼 교육열이 높고 경제력 있는 부모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경우, 조기유학을 떠났거나 다녀 온 경험이 있는 아이들의 수가 지역 평균보다 훨씬 웃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분당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가깝게 지내는 이웃 아줌마 10명이 모인 친목모임 회원들만 해도 4명이 조기 유학을 보냈거나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 중 형제를 함께 보낸 집까지 포함하면 조기 유학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의 수는 50%를 넘어선다.

조기유학 하면 돈 들고 마음 고생한다지만
어린 자녀들의 조기유학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뭐 하러 돈 들여가며 외국까지 보내 고생을 시키느냐? 영어가 인생의 전부냐? 국내에서 공부해도 잘만 하더라, 있는 것들의 공연한 '돈지랄' 때문에 없는 가정 아이들만 피해를 본다, 교육도 부익부 빈익빈이다 등등 말들도 많다.

하지만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시험으로 점수 매기기, 등수 정하기, 줄 세우기를 시작해 대학입학은 물론 입사시험에서까지 고득점의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영어 실력 없는 학생으로 살아가기가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물론, 형편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겠지만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틀어준 영어 교육 비디오로 한두 마디씩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은 유치원 입학 전 이미 알파벳을 깨우치고 영어 유치원에서는 어지간한 일상어를 익힌다. 강남이나 분당 몇몇 유명 유치원의 경우, 외국에서 살다가 온 아이들이 많아서 국내에서 어설프게 배운 영어 실력만으로는 입학조차 허가되지 않는 곳이 있을 정도다.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로 조기유학이나 해외거주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아 국내파 영어선생님이 수업 중 해외파 학생들에게 발음을 교정 받는 민망한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학생들 앞에서 망신당할 것이 두려워 뒤늦게 어학연수를 떠나는 영어교사도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영어 못 하면 사람 취급 않는 현실 때문에





사진은 미국 베이커 초등학교의 영어 수업 장면.


ⓒ 신향식


한 유학원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내용을 보면, 현재 조기 유학은 해외에 나가 현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경우, 영어 등 외국어 능력을 높이고 이를 인정받아 국내 명문대학에 진학하려고 하는 경우, 해외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국내대학 국제학부로 진학하려는 경우 등 크게 세 가지 정도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국제중이나 특목고 입학을 목적으로 단기 유학길에 오르는 초·중등 학생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조기유학은커녕 해외유학 자체가 힘들었던 40~50대의 상당수는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일정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당시 만해도 유학파가 적었던 탓에 유창한 외국어 실력만 가지고도 조직 내에서 크게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과거 유학파에게 한 번쯤 눌려 본 경험이 있는 국내파 가장의 경우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식만큼은 우물 안 개구리로 키우지 않겠다는 잠재의식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나이 사십에 이르러 스스로 기러기 아빠가 되기를 마다치 않는 희생정신까지 보이게 되는 것이다.

조기유학을 통해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는 것은 물론 한국에서처럼 아등바등하며 모의고사니 야자니 보충수업이니 그렇게 힘들게 매달리지 않아도 국내외 대학에 진학에 좀 더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다니 경제력만 허락한다면 어느 부모인들 보내고 싶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로 엄마들의 치맛바람뿐 아니라 아빠들의 이유 있는 바짓바람까지 합세한 조기 유학바람은 불경기니 불황이니 제2의 IMF니 하는 지금도 여전히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조기유학 반대론자인 나도 불안해지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취업준비생.


ⓒ 김동환


"어제도 전화가 왔는데 홈스테이하는 집에 불만이 많더라구. 아줌마가 잔소리를 너무 한다는 거야. 한국에 있을 때 제 방도 하나 치워보지 않고 살았는데 남의 집에 있다보니 아무래도 잔소리를 듣는 거지 뭐. 공부는 한국보다 쉽고 말도 빨리 늘어서 학교생활은 재미있다니까 그것만도 다행이다 싶어."

"난 아무래도 가야 할 것 같아. 어느 정도 적응할 때까지는 함께 있어주다 오려고. 기러기 아빠 만들기 싫어서 안 가려고 했는데 애가 너무 어려서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거 있지. 남편도 나보고 애랑 함께 가 있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고 하고…." 유학 간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조기 유학은커녕 아직 어학연수조차 다녀와 본 적 없는 큰 아들이 전역을 앞두고 있고, 9월이면 복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대학 취업정보실 관계자는 요즘 잘 나간다는 대기업이나, 공공기업에 취업하려면 영어는 토익 900이 기본이며 HSK(중국어능력시험), JLPT(일본어 능력시험)도 상당한 등급 따 두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조기 유학을 하지 못했을 경우 본격적으로 입사시험 준비를 하게 될 대학교 4학년 이전에 영어권과 아시아권 단기어학 연수라도 다녀와야 빠지지 않는 '스펙'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잘 나간다는 유명 대기업이 아니라면 점수가 그리 높지 않더라도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 외국인과의 대화가 자유로운 경우, 취업에 훨씬 유리하다는 말도 함께 전한다.

나의 두 아들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제도권 교육과 치열하게 부딪히며 힘겹게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낸 경우다. 수도 없이 대안학교를 생각하고 수도 없이 조기유학를 고심했지만 유학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까지 해야 할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 회의적이었기에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10년 전 만해도 나는 조기유학 반대론자였다. 부모를 떠나 혼자 공부를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 조기유학을 통해 얻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영어는 그저 사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갖추면 될 교양일 뿐 내 나라 말만 잘 하면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누군가 나에게 자녀의 조기유학에 대해 물어 온다면 예전처럼 강한 논리로 반대하지는 못할 것 같다. 전역을 앞두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다는 아들 역시 외국어를 가장 큰 고민거리로 꼽고 있다.

정녕 국민들이 미국 거지 되길 바라는 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캐나다로 조기 유학을 떠났었던 사촌동생의 경우, 한국으로 돌아와 한 대학의 국제학부를 마친 후 영어 실력 하나로 알 만한 회사에 취업을 한 경우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한국말을 많이 잊어 가족간의 대화에서도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편하다는 사촌동생.

사촌동생의 형편없는 한국어 실력은 입사전형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우리말을 너무 잘 하는 내 아들의 형편없는 영어 실력은 취업에 심각한 결격사유가 되는 것이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고소득층 부모는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원정출산, 이중국적, 조기유학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게 되고 그런 부모를 갖지 못한 서민의 자녀 국내파들은 당당하게 실력을 겨루어 보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저들만의 리그에서 도태되는 좌절을 맛보게 된다.

이쯤 되니 대한민국이 미국의 52번째 주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영어를 우상처럼 받들고 오직 영어만이 살길이라는 가치로 나아갈 줄 알았으면 내 아들도 미국 거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 흔한 연수라도 한번 다녀오게 할 걸이라는 씁쓸한 후회가 밀려온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Posted by 솔라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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